캐파 파트너 업체인 ‘씨오지’는 과거 베가폰을 디자인했던 최용우 대표가 설립한 제품 디자인 전문회사입니다. 최 대표는 각 제품에는 고유의 ‘목적’이 있고, 이는 제품의 기능과 역할을 통해 구현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제품 디자인은 소비자의 편의성에 중점을 두고 ‘나보다 남을 앞에 둬야 한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차별화된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지하철 1호선 인천역은 인천국제공항의 정남쪽에 있다?
지난 2014년까지 발행된 지하철 노선도<아래 왼쪽 사진 참고>를 본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인천역은 영종도에 위치한 인천공항의 북동쪽에 있다. <아래 오른쪽 사진 참고>
과거 지하철 노선도는 실제 지리와는 동떨어진, 그야말로 ‘노선’을 순차적으로 표시해주는 종이에 가까웠다. 지하철 노선도는 ‘으레’ 그렇게 만들어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프랑스 출신 디자이너 육 체로비츠(Jug Cerovic)가 수도권 지하철 노선도를 실제 지리적 위치에 맞게 다시 만든 노선도가 ‘외국인이 만든 더 정확한 지하철 노선도’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되면서 이같은 고정관념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국내 대표 포털사이트인 네이버도 육 체로비츠의 노선도를 바탕으로 수도권 지하철 노선도를 다시 만들었다.
‘디자인은 추상적인 거니까, 현실이랑 좀 동떨어져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고정관념이었다. 현실을 반영한 실용적인 디자인도 얼마든지 가능했던 것이다.
2014년 서울 메트로의 지하철 노선도(좌)와 2022년 현재 네이버 지하철 노선도. (출처=서울메트로, 네이버)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졌던 지하철 노선도 논쟁의 기원은 20세기 미국 뉴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972년 이탈리아 출신 디자이너 마시모 비넬리는 당시 실제 지리적 위치는 고려하지 않은 채 90도와 45도의 정형화된 각도로 배치돼 있던 뉴욕의 지하철 노선도를 지도의 본래 목적에 맞게 바꿔놨다. ‘기능적인 아름다움’을 주창하며 디자인과 실용성의 밸런스를 고민한 그가 만든 뉴욕 지하철 노선도는 현대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영구 컬렉션으로 포함됐다.
디자인에 실용의 가치를 담는 것. 18년 째 디자인 업계에 몸담으며 자신의 디자인회사를 이끌고 있는 최용우 씨오지 대표<아래 사진>에게 50년 전 마시모 비넬리가 했던 고민은 현재 진행형이다. 미적인 감각과 실용성의 밸런스,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머리 아픈 고민을 하는 최용우 대표를 지난 4일 캐파(CAPA)가 만났다.
Q> 디자인 단계에서부터 실용성을 특히 강조하는 이유가 뭔가
“제품은 제품마다 가지고 있는 고유한 목적성이 있다. 저는 이 목적성을 ‘제품의 언어’라고 부른다. 기능과 역할이라는 내용이 언어인 것이다. 제품이 본래 가지고 있는 언어와 어긋나게 디자인 된다면 어떻겠나. 제품의 목적성을 상실하게 된다.
가령, ‘디자인 소화기’ 사례를 보자. 최근 가정용 소화기가 많이 보급되면서 오브제로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 소화기들이 시중에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기존의 문법을 과도하게 깨뜨린 소화기들이 많이 보인다. 노란색, 초록색 소화기들이 그 예다.
불이 났을 때 소화기를 찾는 사람은 빨간색 소화기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디자인적으로 색감이 예쁘다고 노란색, 초록색 소화기를 구비해놓는다면, 위급 상황에서 쉽게 소화기를 찾을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서 씨오지는 제품 디자인 업체지만 디자인의 마지노선을 항상 고민한다. 제품이 목적성을 상실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Q> 실용성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된 계기가 있나
“과거 휴대폰 회사에서 일했었다. 배우 이병헌이 “단언컨대”라며 광고하는 ‘SKY 베가 아이언’ 제품을 기억하시나. SKY 핸드폰 디자인만 11년 했다.
한창 변신로봇 같은 휴대폰이 유행이었다. ‘가로본능’처럼 화면이 90도로 돌아가는 휴대폰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유행에 즈음해서 회사에서 이탈리아로 연수 겸 워크샵을 갔다. 이탈리아 현지에서 ‘마지스’라는 디자인 업체의 70세가 넘는 대표를 만났다. 최근 한국에서 유행하는 변신로봇 디자인을 소개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날카로웠다. ‘왜 필요한가.’
눈에 띄는 획기적인 디자인을 선보여서 무조건적인 양산을 하기 위한 디자인은 정답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양산이 성공의 척도이던 시절, 디자인 하나하나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Q> 휴대폰 디자인을 하는 것도 충분히 보람있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창업을 결심하게 됐나
“길거리를 지나다니다가 SKY 베가 아이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면 뿌듯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회사에서 만든 제품이기 때문에 디자인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한정적이었다. 휴대폰 이외의 모든 사물까지도, 사소한 불편함들을 발견하면 먼저 디자인적으로 해소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었다. 디자인할 수 있는 제품 스펙트럼도 확장하고, 디자인 업무에 전면에 나서고 싶어 회사를 세웠다.”
Q> 산업디자이너로서 철학이 있다면
“산업디자인은 디자이너의 철학보다는 사용자에 초점이 더 맞춰져 있다. 휴대폰 하단의 굴곡을 어느 정도 각도로 둥글게 만들지는 오롯이 사용자의 편리성, 그립감에 달려있다. 제품의 목적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보다 합리적이면서 보다 대중적인 디자인을 찾는 것이 디자이너의 몫이다. 결국 디자이너 개인의 미적 취향보다 제품을 사용할 사용자의 편의성을 더 중요시해야 한다. 나보다 남이 중심이 돼야하는 것은 디자이너의 숙명이다.”
Q> 캐파를 통해 의뢰 받은 디자인 가운데 기억에 남는 제품이 있다면
“자전거 헬멧이었다. 공유 킥보드에 함께 제공되는 헬멧이었는데, ‘폴딩(folding)이 되는 헬멧이었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주문의 핵심이었다. 고객이 접혀지는 자전거 헬멧에 대한 특허만 보유한 상태였고, (구체적인) 제조에 대한 지식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Q> 다른 제품과 차별화되는 디자인 포인트가 있었나
“헬멧 역시 실용성이 최우선 목적이었다. 디자인적으로만 예쁜 헬멧보다는 착용했을 때 편리하고 실제 머리를 보호해주는 기능이 충족돼야 했다. 당장 ‘휴먼 스케일(human scale)’부터 공부했다. 서양인의 두상과 동양인의 두상은 어떻게 다르고, 국내에서 주로 활용되는 헬멧 사이즈까지 조사해 파악했다. 단순히 디자인만 예쁜 헬멧 시안도 나왔지만, 그 정도로는 스스로 용납이 안 됐다. 디자인만 예쁜 헬멧은 ‘크몽’이나 ‘숨고’같은 프리랜서 마켓에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지 않나. 하나하나 공부한 내용을 고객 분께 설명드리고, 헬멧의 곡선 각도부터 완충재의 정도까지 하나하나 이유를 설명드렸다.”
Q> 고객의 반응은 어땠나
“흡족해하셨다. 보통 씨오지에 찾아오시는 고객 분들은 대부분 만족하고 돌아가신다(웃음). 처음 씨오지를 찾아오셨다가, 연(年) 단위로 3년 동안 디자인을 맡겨주신 고객 분도 있다. 모르는 부분까지 공부해가며 디자인의 이유를 설명해드리고, 제조 공정 상 디자인 이후의 단계인 ‘양산’까지도 컨설팅해드리기 때문에 씨오지를 다시 찾는 단골 고객 분들이 많다.”
Q> 디자인 회사에서 양산 컨설팅도 해준다는 건가?
“‘제품’을 만드는 일은 디자인 단계에서 끝나지 않는다. 11년 동안 휴대폰 제조업계에서 몸담았기 때문에 양산을 위한 네트워킹이 자연스레 구축돼있다. 제품에 따라서는 양산을 위한 컨설팅을 무료로 진행하기도 한다. 기구 설계에 대한 리소스도 확보돼있다. 제품의 실질적인 기능을 반영한 디자인이 씨오지에서 가능한 이유다. 디자인을 마무리한 이후에도 시사출 단계, 컬러 선택 단계 등 꾸준히 제품에 대한 컨설팅을 지속하고 있다. 디자인 기획부터, 브랜딩, 양산, 패키징까지 씨오지에서 한 큐에 해결할 수 있다. ”
Q> 어떤 제품까지 디자인할 수 있나
“제가 공부할 수 있는 분야면 제한이 없다(웃음). 표면적으로 디자인만 하는 것이라면 사실상 제품군에 제한이 없다. 하지만 내적인 기능들까지 함께 이해한 디자인이 가능하려면 제품 자체에 상당한 시간을 쏟아붓는 공부가 필요하다.”
Q> 디자인하려고 ‘이런 것까지 공부해봤다’?
“형광 양자전 분석기까지 공부해봤다(웃음). SK하이닉스에서 의뢰받은 제품이었는데, 빛을 투과해서 세포를 스캐닝해 균이 포집해있는 정도를 분석할 수 있는 기기였다. 산업 디자인을 전공한 문과 출신이지만, 의료계의 기전부터 물리학까지 공부해서 디자인했다.
그렇다고 꼭 전문적인 제품만 디자인하는 것은 아니다. ‘한샘’의 진공블렌더부터 ‘한솔교육’의 층간소음 매트, ‘일광전구’의 조명까지 실생활에서 많이 사용되는 제품들도 디자인하고 있다.”
Q>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건 자기 이름을 건 디자인을 하고 싶었기 때문 아닌가
“아니다. 디자인에 있어 ‘나의 것’이란 없다. 제품은 제작자가 만드는 것이다. 디자이너는 제작자보다 앞설 수 없고,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보다 앞설 수 없다. (디자이너가) 전면에 나서는 디자인보다 가능한 한 많은 고객이 제품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게끔 도와드리는 것이 씨오지의 역할인 것 같다.”
Q>앞으로의 계획은
“꾸준히, 트렌드를 치고 나갈 수 있는 디자인 업체로 남고 싶다. 제가 디자이너치고는 나이가 꽤 많다. 젊은 디자이너 친구들이 만든 제품들을 보며 ‘젊은 센스’를 꾸준히 공부하고 있다. 디자이너들 사이에선 흔히 ‘슥’ 보기만 해도 올드한 디자인은 구분된다.
디자인도 지적 노동이다. 지속적으로 새로운 지식, 트렌드를 머리에 집어넣어야 감을 잃지 않는다. 젊은 감각을 뒤쫓아가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젊은 감각을 씨오지의 새로운 감각으로 재탄생시키는 회사가 되기 위해 매일 고군분투할 계획이다.”
서두에 소개한 모더니즘 디자인의 선구자인 마시모 비넬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스타일은 유행이 있다. 좋은 디자인이란 언어이지 스타일이 아니다.”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제품 사용자와 제작자를 먼저 생각하는 디자인을 만드는 업체. 나아가 디자인 트렌드를 쉼없이 공부하는 업체. 최용우 대표에게서 30년 전 뉴욕 지하철 노선도로 세상의 주목을 받은 디자이너 마시모 비넬리의 철학이 비쳐보인다.